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처음엔 그랬어요.
그저 조용한 드라마겠거니 했죠.
아이유랑 박보검이 나온다고 하니까,
가볍게 한 편 정도는 봐도 괜찮겠다 싶었어요.
근데,
이상하게도 몇 분 지나고 나니까
화면에서 뭔가가 자꾸 따라와요.
말은 없는데, 감정이 흐르고,
배경은 조용한데 마음이 웅성거리고.
그 말투 때문인지,
배경 속 바람 소리 때문인지,
그저 조용한 그들의 눈빛 때문인지 몰라도
보는 내내…
가슴이 자꾸 흔들렸어요.
아무것도 격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
이상하게도 자꾸만 내 기억들이 건드려졌어요.
그리고,
나처럼 중년이 된 사람이라면
아마 더 많이 공감했을 거예요.
이 드라마는 그런 작품이었어요.
그냥 우리 얘기 같았던 이야기
요즘 드라마들 보면
전개가 너무 빠르거나,
사건이 넘쳐나는 경우가 많잖아요.
눈물도 쉽게 흘리고, 고백도 쉽게 하고.
하지만 ‘폭싹 속았수다’는
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데,
이야기는 흘러가고 있었어요.
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,
제주도라는 한 공간을 배경으로
애순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이
그저 담담하게 그려졌어요.
어릴 적 부모를 잃고,
어린 동생을 돌보며
어른 흉내를 내야 했던 아이.
꿈도 접고, 학교도 포기하고,
하루하루 버텨내는 삶.
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어요.
우리 엄마가 그랬고,
우리도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있었고.
그때는 누구도 그게 힘든 줄 몰랐죠.
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.
그 시절을
이 드라마는 조용히, 정확하게 보여줬어요.
설명하지 않지만,
한 장면 한 장면이 말하고 있었죠.
"당신, 잘 살아오셨어요."라고.
말하지 못한 사랑,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
관식과 애순의 관계는
말로는 설명이 어려워요.
사랑이었는지도, 우정이었는지도
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사이.
하지만 그 둘 사이엔
누구보다 진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어요.
늘 곁에 있었지만
한 번도 서로의 마음을
진짜로 꺼내놓은 적 없던 사이.
그게 더 아프게 느껴졌어요.
사랑이라기엔 서툴고,
우정이라기엔 너무 깊은…
그리고 그 마음,
그 애틋함은 말이 아닌 눈빛과 행동으로 드러났어요.
관식은 말하지 않았어요.
그저 애순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고,
누가 시키지 않아도
늘 그녀의 곁을 지켰죠.
애순도 알았어요.
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.
서로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그 마음.
그런 관계,
살아오며 한 번쯤은 있었죠.
좋아했지만,
말하지 못하고 지나간 사람.
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얼굴 하나.
그 사람 생각이 자꾸 났어요.
“그때 내가 왜 그 말을 못 했을까…”
드라마를 보는 동안
그 기억들이 조용히 떠올랐어요.
감정은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전해지는 것
‘폭싹 속았수다’는
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.
드라마를 보면서
한 번도 누가 울부짖거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본 적이 없어요.
대신,
인물들은 눈빛으로,
잠시 멈춰 있는 동작으로,
아무 말도 없는 침묵으로
모든 걸 말했죠.
관식이 자전거를 조용히 고쳐주고
애순이 말없이 밥을 차려주는 그 장면들.
그걸 보고 있으면
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해요.
요즘 세상처럼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
이렇게 말이 없는 드라마가
더 많은 걸 전해준다는 게
놀라웠어요.
말을 안 해도 알았던 시절.
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을 느꼈던 그때.
그 시절의 감정이
화면을 통해 다시 떠오르더라고요.
엄마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
애순의 어머니를 보면서
처음엔 답답했어요.
왜 저렇게 퉁명스럽고,
왜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못 해줄까 싶었죠.
근데 점점 보면서
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.
그 시대의 엄마들은
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요.
그저 일하고,
가족 챙기고,
묵묵히 살아가는 게 사랑의 방식이었죠.
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.
내 엄마도,
나도 어쩌면 그랬는지도 몰라요.
따뜻한 말보다
밥을 해주는 걸로,
묻지 않고 기다리는 걸로,
그게 전부였던 사랑.
이 드라마는
그 무게를 정확히 보여줬어요.
무거운 말 없이,
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 마음을요.
끝인 줄 알았는데, 시작일 수도 있다는 위로
중년이라는 건
뭔가 다 지나가버린 시기라고 생각하기 쉬워요.
더 이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?
마음 설레는 일은 남아 있을까?
그런데 ‘폭싹 속았수다’는
그렇지 않다고 말해줘요.
고향으로 돌아온 애순,
서서히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
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는 과정.
그 장면들을 보며
희미하게나마 용기가 생겼어요.
지금부터라도
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생각.
아직 늦지 않았다는 믿음.
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는데
이 드라마는 그걸 조용히 전해줬어요.
우리 모두의 이야기
이 드라마는
누군가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에요.
누구나의, 우리 모두의 이야기예요.
보고 있으면
내 인생이 겹쳐 보이고,
그동안 덮어두었던 기억들이
하나둘 떠오르죠.
그 사람의 얼굴,
그 시절의 내 마음,
지나간 계절들까지.
그게 바로
‘폭싹 속았수다’가 특별한 이유예요.
단지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
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
지금이라도 떠올릴 수 있게 해줘요.
그리고
그 말들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게 만들어줘요.
“괜찮아,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.”
마무리하며 – 조용히 흔들리는 감정, 그게 진짜 위로다
요란한 위로는
때로는 더 피곤할 때가 있어요.
하지만 조용히,
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존재는
마음을 더 깊이 울리죠.
‘폭싹 속았수다’는
그런 드라마예요.
중년의 시간,
지나온 감정들,
말하지 못했던 사랑.
그 모든 걸
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해주고
“그 시절도 괜찮았고,
지금도 괜찮다”고 말해줘요.
만약
지금 당신도
누군가를 조용히 떠올리고 있다면,
혹은 마음 한구석이 자꾸 무거워진다면,
‘폭싹 속았수다’를
한 번 다시 꺼내보세요.
화려한 장면 하나 없이도
당신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안아줄
그런 드라마니까요.